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23세 (문단 편집) ==== “징검다리” 교황 ==== || [[파일:external/fd5d05bb6d202e902efda57d0345352c4d4151af59860823b4920cd61ca28897.jpg]] || 1958년(76세) 10월 9일 [[비오 12세]]가 사망하고 동월 28일 [[콘클라베]]에서 후임 [[교황]]으로 선출되었다. 교황으로 선출되면 [[흰색]] [[수단(의복)|수단]](soutane)을 입고 사도궁 발코니에 서서 그 앞에 군중들과 온 세상을 위해 축복함이 관례다.[* [[교황]]으로 선출된 직후에 하는 이 축복을 '도시(로마)와 온 세상에'라는 뜻의 [[라틴어]] urbi et orbi라고 부른다. 교황은 당선 직후뿐만 아니라 [[주님 성탄 대축일]]과 [[주님 부활 대축일]], 그리고 교황이 판단하기에 특별한 때에 이 장엄한 축복을 행한다.] 누가 교황이 될지 모르므로 바티칸 재단사들은 미리 대/중/소 크기로 임시 [[수단(의복)|수단]]을 지어둔다. 그런데 허리통 굵기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, 허리통이 굵은 론칼리 추기경이 교황이 되자 당황했다. 그래서 [[수단(의복)|수단]]을 뜯어서 옷핀으로 고정시켜 겨우 입혔는데, 사람들은 [[수단(의복)|수단]]이 너무 꽉 조여서 꼭 [[죄수복]]처럼 보인다고 생각했다. 당시 [[콘클라베]]는 정말로 누가 교황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. 당시 [[이탈리아]] 신문에서는 차기 교황이 될 만한 추기경 후보를 20명이나 뽑았는데, 선거에 참여한 참가한 추기경 총수가 51명에 불과한 만큼, 40%가 후보로 거론된 것이다. 하지만 론칼리 추기경은 그 신문에 소개되지 못했다. 하지만 실제로 투표가 시작되자 [[콘클라베]] 시작 전 예상과는 달리, 처음부터 안젤로가 유력한 교황 후보임이 드러났다. 첫 투표부터, 비록 당선이 유효한 투표 수를 받지는 못했지만, 론칼리 추기경은 가장 표를 많이 받았다. 투표가 계속되면서 한때 지지율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표가 몰려 교황으로 당선되었다. [[추기경]]단 중 [[이탈리아]]파와 [[프랑스]]파가 나뉘었는데, 쉬어가는 역할도 하면서 양(兩) 파가 모두 합의할 만큼, 나이도 많고 야심도 없으면서도 덕망은 있는 추기경이 론칼리 추기경뿐이었다. 새 교황을 뽑는 [[콘클라베]]에서 두 파가 서로 합의에 달하지 못하자, 서로가 합의할 수 있고 쉬어갈 수 있는 사람을 뽑자고 의견이 모인 것이다. 당시 가장 유력한 교황 후보로 꼽혔던 프랑스파 타르티니 추기경이 낙선한 것도 이런 이유였다. 이 사람은 능력도 있고 정치 세력도 당시 추기경들을 통틀어 가장 큰 편에 속했지만, 정적이 너무 많았다. 무엇보다 과격하고 괄괄한 성격이 문제였는데, '''교황([[비오 12세]]) 앞에서 그 자리에 없던 누군가를 욕하는 육두문자를 퍼부었다'''는 일화까지 있다.[* 이때 교황 앞에서 욕설을 퍼붓는 타르티니 추기경의 모습에 열받은 [[파스칼리나 레네르트]] 수녀는, 타르티니 추기경에게 삿대질까지 했다고 전해진다! 교황 앞에서 육두문자를 퍼붓는 사람이나, 일개 수녀의 신분으로 추기경에게 대든 사람이나 참 대단한 인간들이다.] 추기경단을 비롯한 바티칸 내부에선 권위주의자에다 고집불통인 전임 교황 비오 12세, 그리고 비오 12세의 신임을 등에 업고 바티칸의 실세로 위세를 날렸기에 '여교황'이란 소리까지 들었던 [[파스칼리나 레네르트|파스칼리나]] 수녀에게 워낙 오래 지쳐서 '이제 좀 쉬자.'는 의견이 강했다. 그래서 론칼리 추기경을 뽑은 것이다. 그래서 요한 23세 즉위 당시에는 '징검다리 교황'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. [[콘클라베]]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안젤로 자신도 교황이 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,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